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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과 오랑케 홍타이지


 


남한산성은 1636년 병자년(丙子年) 12월, 12만 8천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청 태종 홍타이지를 피해 인조가 숨어든 장소였다.
그리고 이듬해 1월 30일 서울 송파구 ‘삼전도(三田渡) 들판’에서 인조는 무릎을 꿇었다.

이러한 급박한 시기를 전해주는 책이 있다.

바로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책속의 책이다.

다음은 저자가 병자호란을 구상한 과정과 축약한 내용이다.

병자호란 이야기

만주족 보다 앞섰던 조선이 40년 만에 신하국으로 무릎 꿇게 된 과정을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 의미로 나눠 일목요연하게 설명합니다.
사대주의란 이념이 국가생존의 ‘수단’에서 ‘목적’으로 변용되면서
망국으로 치닫게 된다는 교훈도 기술할 방침입니다.


〔책 속의 책〕
병자호란, 피할 수 있었던 ‘어리석은 전쟁’

1636년 병자년(丙子年) 12월, 12만 8천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청 태종 홍타이지는 이듬해 1월 30일 서울 송파구 ‘삼전도(三田渡) 들판’에서 조선 왕을 무릎 꿇렸다. 나중에 인조(仁祖)로 불린 이종(李倧)은 바닥에 꿇어앉아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개과천선을 다짐한 뒤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였다.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3번씩 모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이었다. 이로써 홍타이지는 ‘한반도를 무력으로 정복한 유일한 외국군주’가 되었고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74년 ‘고전(古典)읽기’가 전국에서 반강제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당시 읽은 고대소설 박씨전(朴氏傳)의 기억이 생생하다. 박씨전은 이시백(李時白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방어책임자)의 부인 박씨가 조선을 침공한 오랑캐에게 복수하는 내용인데 조선을 괴롭히는 악의 축은 호왕(胡王)이다. 호왕은 곧 홍타이지이니, 조선인들에게 오랫동안 ‘공포의 대왕’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소설 속의 복수나 정신승리법은 게으른 대응이었다. 삼전도의 굴욕은 좀 더 세밀히 복기(復碁)할 가치가 있다. 조선이 만주국과 호왕을 연구하고 조금만 유연하게 대처하였더라면 충분히 피할 수도 있었던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주제의식은 신생 만주국이 한반도를 정복하고 천하를 제패하는 강국으로 바뀐 ‘성공의 비결’과 조선이 하대했던 오랑캐에게 무릎 꿇은 ‘실패의 원인’을 파악하는데 있다. 병자호란이야 말로 만주국의 성공과 조선의 실패를 극명하게 대비할 수 있는 사건이란 점에서 책의 말미에서 재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 전쟁의 배경과 과정, 결과의 순서로 살펴본다. 앞의 3부 4장의 ‘조선 정벌...대명체제(大明體制) 끝장내기’가 만주의 시각에서 조만전쟁을 다뤘다면 ‘책속의 책’은 조선의 입장에서 본 병자호란의 모습이라는 차이가 있다.

<1.배경>외교의 실패...“전쟁으로 결판 내자”

애당초 만주족 지도부는 조선을 자신들과 손잡을 수 있는 잠재적 동
지로 간주하였다. 중원의 한족(漢族)에 차별받고 조공을 바치며 살아가는 ‘오랑캐’라는 연대의식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이 비록 명나라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듯 보이지만 속마음은 다를 것으로 여겼다. 그러므로 만주와 몽골이 힘을 합쳐 중원을 정복하는 과정에 조선이 동참할 수 있거나 적어도 중립은 지켜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조선의 행보는 정반대였다. 명에 찰싹 달라붙어 필요 이상으로 자신들을 적대시 하는데 열을 받았다. 특히 홍타이지는 조선에 심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만주측이 보기에 조선은 ‘오랑캐 주제에 스스로를 중화로 착각해 명나라를 편들고, 같은 오랑캐를 적대시하는 한심한 나라’였다. 만주국의 주(主)관심사는 중원 공략이었던 만큼 후방의 조선과는 가능한 문제를 일으키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조선-만주 외교는 어설프기 짝이 없었고 양국 관계는 갈등 해소가 아니라 증오의 심화로 이어졌다.
만주국의 요구가 지나쳤던 탓도 있지만 조선이 군력(軍力)이 약한데도 상대를 오랑캐로 얕보며 적대 입장으로 일관한 것도 큰 요인이었다. 외교가 실패한 틈을 비집고 전쟁의 싹은 자라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