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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월 12일 오전 11:12

책읽는백조 2016. 1. 12. 11:14

천하를 훔친 도적, 오랑캐 홍타이지

아버지 누르하치로부터 물려받은 작은 나라 ‘후금’을 불과 10년 사이 동아시아 최강국 ‘청나라’로 키워낸 도적

“…또 너희 나라에서 오고간 문서를 입수해 보니 흔히 우리 군대를 도적이라고 적고 있다. 이는 너희 군신이 평소에 우리 군대를 도적이라 불러왔기에 이를 깨닫지 못하고 이 지경에 이른 것이다. 남의 물건을 몰래 훔치는 자를 도적이라 한다고 들었다. 우리가 정말로 도적이라면 너는 왜 사로잡지 않고 그대로 두면서 입과 혀로만 욕을 한단 말인가…”
1637년 1월 17일, 병자호란 와중에 홍타이지가 ‘대청(大淸) 황제’의 이름으로 조선국왕에게 보낸 국서의 일부이다. 홍타이지는 조선에서 만주족을 오랑캐(胡虜, 호로)라고 비하하고 자신을 도적(奴賊, 노적)이라 부르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감히 황제인 나를 보고 도적이라니, 용서할 수 없다…”라며 가벼이 흥분하지 않는다. 조선의 비난과 욕설에 같은 말(言)로 응수할 생각이 없다. 오히려 스스로를 도적에 비유하며 반박하는 여유를 부린다. “그래 내가 도적이라고 하자. 그렇다면 너, 조선 임금은 왜 도적을 체포하지 않는가?”라며 조롱할 뿐이다.
홍타이지는 어떤 인물일까? 앞에서 든 도적이라는 표현은 틀리지 않았다. 홍타이지는 분명 도적이었다. 그러나 시시한 도둑이 아니라 ‘천하를 훔친 도적’이다. 그는 사방으로 군대를 찔러 넣어 사람과 가축, 재물을 헤아릴 수 없이 빼앗았지만 약탈로 이룩한 부를 지배층의 사치스런 삶에 허비한 것이 아니라 새롭고 강한 나라를 건설하는 밑천으로 활용하였다. 덕분에 홍타이지는 ‘작은 도적’이 아니라 ‘천하의 대도(大盜)’가 될 수 있었다.
홍타이지는 천하를 훔칠 웅략을 세웠고 이를 현실로 만들기 위해 온 몸을 불살랐던 사나이다. 그에게 있어 조선 정복은 ‘천하 석권’이란 결승전에 앞서 치른 여러 토너먼트전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우리 만주족을 도적이니 오랑캐니 얕보는 자들, 말이 아닌 실력으로 부수어 주겠다…’ 이것이 홍타이지가 대군을 몰아 조선으로, 중국으로 닥친 한 배경이다.
홍타이지는 비록 ‘미운 적’이지만 한반도 관계사에 가두어 평가할 수 있는 인물은 아니다. 가난하고 약체였던 만주족이 대륙의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는 바탕을 마련했던 영웅이다. 현대 중국은 청나라에게서 많은 빚을 지고 있다. 당장 960만㎢의 방대한 국토면적부터 청의 유산이다. 한족이 세운 송과 명의 영역은 4∼500만㎢에 불과했던 반면, 청나라 건륭제 시대의 영토는 1,300만㎢로 커졌다. 청의 영역에서 외몽골과 연해주, 중앙아시아 일부를 상실한 것이 중국의 지금 영토인 것이다.
이런 청나라를 실질적으로 창건한 인물이 홍타이지이다. 다수의 한족과 55개 소수민족이 어울려 살아가는 다민족국가 중국… 다민족협화(多民族協和)의 사상적 기초는 한족이 아니라 만주족 홍타이지가 마련하였다. 그런 점에서 홍타이지는 ‘현대중국의 설계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만주족의 성공 역사’에서도 맨 윗자리에 기술해야 할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