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남한산성 병자호란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 탄생 뒷 이야기

책읽는백조 2016. 11. 18. 16:51

병자호란, 피할 수 있었던 ‘어리석은 전쟁’이라고

오랑캐 홍타이지 천하를 얻다의 저자 장한식은 이야기합니다.

 

그가 홍타이지 관련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에서 밝히고 있는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만주족 이야기’를 써보기로 한 것은 2003년~2006년

베이징 특파원으로 재직하던 시절 만주족들을 접촉하면서부터입니다.

만주족은 자신들의 말과 글, 터전을 잃고 한족에 동화돼

후회하고 있다는 우리의 상식과 달리

만주족 후예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중국을 정복하고

대륙의 주인이 된 사실을 높이 평가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족은 중국 주류사회에 별문제 없이 진출해 ‘양반의 후예’처럼

대우받는다고 할 수 있으며 한족들도 다른 소수민족과 달리

만주족은 하대시하거나 차별하지 않는 분위기였습니다.

만주족이 대륙을 정복한 성공의 역사는 17세기의 일이지만

현재에도 우리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봤습니다.

중국이 굴기하면서 역사문제나 영해.영토 문제 등에서

우리에게 적잖은 스트레스를 가하고 있습니다.

이럴 때 만주족의 성공 이야기는 소국이 대국을 어떻게 다루고

대할지에 대한 교훈을 줍니다.

대국이라고 겁내고 조아릴 것이 아니라 당당하게 대처해야 한다는

‘오랑캐’ 정신을 배울 수 있는 것입니다.

17세기 인구 100만~150만의 만주족이 1억~1억 5천만의

대국 명나라를 정복한 것은 기적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명은 결코 국력이 약해서 만주족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만주족의 집요하고 치밀한 공략이 주효한 결과입니다.

우리가 지금 중국을 정복할 수도 없고, 그럴 이유도 없지만

대국이라고 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다는 것을 만주족들은 말해줍니다.

만주족은 특히 1636년 병자호란을 통해 조선도 정복하였습니다.

우리의 과거 실패를 이해하고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도

만주족의 역사를 공부할 필요성은 다분합니다.

 

책속의 책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는 병자호란 1탄입니다.

 

1636년 병자년(丙子年) 12월, 12만 8천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넌 청 태종 홍타이지는 이듬해 1월 30일 서울 송파구 ‘삼전도(三田渡) 들판’에서 조선 왕을 무릎 꿇렸다. 나중에 인조(仁祖)로 불린 이종(李倧)은 바닥에 꿇어앉아 자신의 ‘죄’를 실토하고 개과천선을 다짐한 뒤 굴욕적인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였다. 세 번 절하고, 한번 절할 때마다 3번씩 모두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항복의식이었다. 이로써 홍타이지는 ‘한반도를 무력으로 정복한 유일한 외국군주’가 되었고 우리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되었다.

필자가 초등학교 4학년이던 1974년 ‘고전(古典)읽기’가 전국에서 반강제적으로 시행되었는데 당시 읽은 고대소설 박씨전(朴氏傳)의 기억이 생생하다. 박씨전은 이시백(李時白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방어책임자)의 부인 박씨가 조선을 침공한 오랑캐에게 복수하는 내용인데 조선을 괴롭히는 악의 축은 호왕(胡王)이다. 호왕은 곧 홍타이지이니, 조선인들에게 오랫동안 ‘공포의 대왕’이었던 셈이다.

 

병자호란은 피할 수 없었던 전쟁인가?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만약 조선이 전략적인 결단에서 홍타이지를 황제로 인정하고 청을 상국으로 대우했다면 수십 만 인명 피해를 본 대전란(大戰亂)은 피할 수도 있었다고 본다. 명과의 전쟁으로 바빴던 홍타이지가 대군을 한반도로 보내야 할 이유는 그리 크지 않았던 것이다.

고려 인종 시절인 1126년 신생강국 금나라가 군신관계를 요구하자 권신 이자겸과 척준경은 나라와 정권을 지키기 위해 ‘자존심’을 접고 이를 수용함으로써 전쟁을 피한 전례가 있다. 하지만 ‘화이론’이라는 경직된 이데올로기로 무장하고 있었던 조선은 고려와 달리 후금의 상황을 인식하고 그들의 요구를 수용할 태세가 전혀 아니었다.

세계관과 처한 입장이 달랐던 양국 간에는 정묘호란 직후부터 갈등이 시작되었다. 군력(軍力)이 약했던 조선으로서는 갈등 관리가 무엇보다

중요했지만 후금과의 외교는 철저히 실패하였다. 후금의 과도한 요구에 전략적으로 대응하기 보다는 신경질적인 반응을 거듭하면서 조선은 ‘전쟁의 함정’에 스스로 빠져 들었다. 그 실상을 들여다보면 당대 조선의 국가운영 실력이 저절로 드러난다.

 

①무역.세폐(歲幣) 갈등

정묘호란 이후 후금이 가장 희망했던 것은 조선과의 무역이었다. 명과의 공식무역이 중단된 상황에서 압록강과 두만강 국경에 시장을 열어 조선의 쌀과 생필품 등을 공급받기를 기대하였다. 후금은 조선과의 개시(開市)를 통해 식량난 등 경제문제를 제도적으로 해소할 복안이었다. 후금은 조선에 포로와 은을 주는 조건으로 다양한 물목을 요구하였다. 1628년 1월 한양에 왔던 후금 사신단은 홍시와 대추, 알밤 등 과일과 약재를 요구했다. 중국산 비단과 청포(靑布), 일본산 후추와 일본도(日本刀) 등도 관심 품목이었다.

반면 조선은 교역에 소극적이었다. 한번 교역의 문을 열어줄 경우 후금의 요구가 끝없이 이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었다. 김상헌 등 척화파가 ‘오랑캐에게 중국산 물품을 넘겨주는 것은 도리가 아니다’며 교류에 반대하는 것도 정치적 부담이었다. 후금은 1627년 12월 심양에 갔던 조선 사절 박난영(朴蘭英)에게 호시(互市)를 열어 무역할 것을 강력히 촉구하였다.

 

“이미 한 집안과 같이 하기로 하늘에 맹세하였으니 어려울 때 서로 구원하는 것이 사람의 떳떳한 도리이다. 모병(毛兵 모문룡의 군사)은 돈도 안 주고 양식을 요구하지만 나(홍타이지)는 이런 기근을 당하여 돈을 주고 사려는 것이다. 만일 서로 구원하지 않으면 유감이 없지 않을 것이다.”<인조실록 1627년 12월 22일조>

 

조선 측은 “양서(평안도와 황해도)는 전쟁으로 탕진됐고 나머지 6도는 흉년이 들어 어렵다”며 난색을 표했지만 후금은 집요했다. 힘에서 밀린 조선은 결국 1628년 2월 중강(中江 압록강 의주 부근의 작은 섬)에 시장을 열고 쌀과 과일, 약재에다 중국과 일본산 물품을 후금 측에 공급했다. 중국산 물품은 모문룡이 주둔한 가도(椵島)를 통해 입수했고 일본 물품은 동래왜관에서 수입하였다. 당시 조선 법령이 통하지 않았던 가도는 국제무역기지로 변모해 각국의 상인이 모여들었다. 조선 상인들은 은이나 인삼을 갖고 가도로 가서 중국산 비단과 청포 등을 구입해 중강에서 후금 상인들에게 판매했다. 후금에 중국과 일본산 물자를 공급하는 중개자 역할을 하며 상당한 이득도 올렸다. 처음에는 꺼리던 조선 상인들도 이익이 생기자 제법 적극성을 띄었지만 ‘상(商)’을 말업(末業)으로 천시했던 조선 조정은 무역규모를 늘릴 생각이 없었다.

개시(開市)는 이뤄졌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마찰이 커졌다. 우선 개시에 대한 양측의 입장이 달랐다. 조선은 봄가을 두 차례만 교역할 것을 희망한 반면 후금은 봄,여름,가을 세 차례 개시하되 필요하면 교역기회를 더 넓히자고 맞섰다. 후금은 중강 외에 함경도 회령에도 시장을 열자고 요구했다. 조선은 마지못해 회령개시에 동의했지만 흐지부지 전략으로 맞섰다.

후금은 조선의 소극적인 교역 태도가 불만이었다면 조선은 후금의 거친 교역방식에 실망하였다. 구매할 물목을 제멋대로 정하는가 하면 가격을 후려치기 일쑤였다. 게다가 후금 상인이 먹을 식량까지 조선이 충당하라고 윽박질렀다. 예컨대 1628년 2월 중강 개시에 참가한 후금 상인은 1300명이나 됐는데 총지휘자격인 잉굴타이는 과거 조명 무역을 전례로 상인들이 먹을 식량과 말먹이(馬草 마초)를 전부 조선 측에 요구했다. 조선은 결국 후금 상인단에게 쌀 2000섬을 공짜로 건네주었다. 후금도 식량이 모자라던 시절인지라 남의 것을 빼앗아 먹는 ‘오랑캐 근성’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세폐(歲幣), 즉 정묘호란의 결과 조선이 후금에 주기로 한 물자의 수량과 품질을 둘러싼 입장 차이도 갈등을 키우는 요인이었다. 1633년 1월 조선 사신 신득연(申得淵)이 심양을 찾았을 때 홍타이지는 세폐를 그대로 돌려보내면서 불만에 찬 국서를 전하였다.

 

“...귀국이 준 물건은 본래 정으로 준 것이 아니며 또 우리가 요구한 것도 아니오. 이는 귀국이 까닭 없이 명을 도와 우리나라를 침범하였다가 하늘의 벌을 받은 것이니 우리가 그 숫자를 정한 것이 실로 이 때문이오. 1년에 두 차례가 불가능하다면 한 차례로 하는 것도 좋겠으나 다만 예단과 교환하는 물건이 점점 적어지고 질이 나빠짐을 심히 간과할 수 없소. 만약에 우리의 말을 따라주지 않는다면 서로 왕래를 끊고 물건만 무역하는 것이 좋겠소...(중략)...내가 지금 섬(가도)을 정벌하려 하니 나에게 큰 배 3백여 척을 의주 포구로 내어 빌려 주어야 할 것이오. 진실로 이와 같이 한다면 귀국의 마음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오. 병선과 예물 이 두 건을 만약 모두 허락하지 않는다면 사신을 다시금 왕래하지 못하게 할 것이오...” <인조실록 1633년 1월 25일조>